통합 검색

통합 검색

발해1300호를 띄우기 까지
폭풍우에 휩쓸려 접안과정에서 사고를 만난 발해 해상항로 뗏목 대탐사대의 준비과정 역시 24일간 바다에서의 사투(死鬪) 못지않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자금 마련이 어렵자 장철수 대장은 살던 집까지 정리해야 했다. 뗏목용 나무 구입에서부터 러시아정부의 최종 출항허가를 얻어내기까지 두달여동안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대원들은 고난을 투지로 승화시키는 의연한 자세를 보였다. 알려지지 않은 발해탐사대의 준비과정과 사연들, 그리고 탐사의 의의.

12월30일 오후 6시 러시아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 내항으로 뗏목 한척이 예인선에 이끌려 미끄러져 들어왔다. 길이 15m, 너비 5m, 전체 넓이 20평 규모. 뗏목치고는 꽤 큰 편이었다. 이 뗏목은 겉모양부터 별난데다 앞돛에 새겨진 도깨비를 닮은 문양까지 낯선 것이어서 유난히 러시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 문양은 도깨비가 아니라 치우(蚩尤) 장군의 얼굴이었다. 치우는 발해의 와당(기와) 유물에도 등장할 정도로 발해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전설적 인물. 기자조선 전 신씨조선의 14대 왕으로 역사서 “한단고기” (桓檀古記)에 민족의 수호신으로 기록돼 있다.

뗏목 이름은 ‘발해 1300호.’ 고구려 후예 대조영이 698년 만주·연해주 땅에 해동성국(海東盛國) 발해를 세운지 올해로 꼭 1천3백년. 이름도 거기서 따온 것이다. 작은 배를 갖고도 동해바다를 앞마당처럼 휘젓고 다녔던 옛 선조들의 웅대한 기상을 오늘에 재현하겠다는 의지가 이 치우 문양 속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집 팔고 십시일반으로 자금 마련
이 뗏목은 다음 날인 97년 12월31일 오후 2시(한국 시각)에 블라디보스토크항을 떠났다. 영사관 직원·교민·유학생 등 동포들이 일부러 항구까지 나와 성공적인 항해를 빌어 주었다. 뗏목 위에서는 장철수(38·탐사대장)·이덕영(49·선장·항해담당)·이용호(35·촬영)·임현규(27·통신) 대원등 네사람이 역시 같은 심정으로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그러나 이날 이 뗏목이 출항하기까지 숨겨진 깊은 사연을 아는 사람은 탐사대원 네사람을 빼고는 없었다. 1월23일 비극적인 최후를 맞기까지 24일 동안의 항해도 힘든 여정이었지만 준비과정 또한 못지않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독도 사랑에 10년째 미쳐 있던 장대장이 발해항로 탐사구상을 한 것은 97년 5월께. 장대장의 뜻에 공감해 이용호 대원이 맨먼저 동참했다. 이어 이덕영 선장과 임현규 대원이 합류해 8개월여 동안 대탐사를 같이 준비한 끝에 이날 결실을 본 것이다.

준비과정에서 가장 큰 고민거리는 역시 자금문제였다. 준비 초기에 산출해 본 총 예산은 4천1백50만원. 줄이고 줄여 꼭 필요한 경비만을 뽑았는 데도 이 정도였다. 자체적으로 1천만원을 마련하고 나머지는 후원과 협찬을 통해 메우려 계획을 세웠다. 주변의 지인들이 뜻을 알고 10만~20만원씩 돈을 모아주었지만 그 정도의 협찬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백방으로 뛰어 다녔으나 후원기업을 찾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결국 자체적으로 돈을 마련하는 길밖에 없었다. 장대장은 1997년 8월께 두 눈을 꼭 감고 살던 집을 정리했다.‘집을 정리하고 나니 왠지 마음이 편치 않다. 부모님 제사 지낼 공간 하나 없다는 사실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 무렵 그의 심정이 배어있는 일기의 한 대목이다. 그래도 모자라는 돈은 아쉬운대로 여기저기서 융통해 채웠다.

그 사이 장대장은 사전답사를 위해 수차례 러시아를 드나들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바닷가로 나가 몸으로 상태를 살펴봤다. 바다에 빠지면 어떨지 직접 물에 뛰어들어 수영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바람은 북서 방향. 쌀쌀한 추위다. 방한대책이 중요하다고 본다’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준비를 더 미룰 수 없어 장대장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다시 날아온 것은 1997년 10월18일. 그러나 여러 가지 도움을 기대했던 한국 상사들의 냉담한 태도는 한때 장대장을 절망에 빠지게 했다. 심지어 장대장이 일기에 ‘한국 상사에는 구걸하고 싶지 않다. 이제 돈에 대해 일체 이야기하지 않겠다’ 고 까지 썼을 정도였다.

그는 10월24일 새벽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난다. ‘꿈에 아버지가 보였다. 형과 나, 아버지가 좋은 차를 몰고 가다 불에 뛰어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을 어떻게 풀이해야 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꿈에 아버지를 보니 기분이 좋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심정이 읽혀진다.

그 덕일까. 시간이 지나면서 현지 한국기업들이 조금씩 달라졌다. 큰 돈을 보태주는 데는 없었지만 뗏목 제작장비나 차량을 지원해 주고 작업을 도울 인력을 보내 주기도 했다. 한국인 현지공사 감독으로부터 스티로폴 10묶음, 농산물유통시장에서 쥬스 10박스, 플랜트업체로부터 받은 볼트와 너트, 교민들이 전해 준 모포·라면·김치 등 눈물겨운 지원내용을 그는 일기에 빼곡이 기록해 두었다.

이처럼 어려웠던 초기에 극동대학의 지원은 큰 도움이 됐다. 극동대학은 뗏목 탐사의 공동주최자이기도 했다. 그보다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우리나라 경기대의 교환학생을 비롯해 유학생이 상당수 머물고 있어 여러 가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숙소부터 극동대학이 기숙사방을 내줘 해결했다. 뗏목 제작에 필요한 통나무 중 일부나마 구입할 수 있었던 것도 극동대학의 지원으로 가능했다.

탐사대원 중 마지막으로 이용호 대원이 러시아에 입국한 것은 11월14일. 대원들이 모두 모였을 때 마침 뗏목제작용 통나무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뗏목을 만들 장소인 블라디보스토크 초스킨에 위치한 44부두 조선소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졌다. 목재가 애초 주문했던 잣나무가 아닌 물푸레나무였던 것이다. 두께도 50cm가 넘어 물에 잘 뜨지조차 않았다. 그래도 방법이 없어 그 나무로 뗏목 제작에 돌입했다.

시간·추위·사기 저하로 애태워
한편 대원들은 극동대와 현지 한국영사관의 도움을 받아 주정부와 모스크바 중앙정부의 탐사 허가와 물품세관 통과 등 행정절차를 밟아 나갔다. 가장 골치를 썩였던 뗏목항해를 연해주정부가 허락하겠다는 뜻을 최초로 비춘 것은 10월 말. 그러나 중앙정부의 최종허가가 떨어진 것은 거의 12월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무려 한달 넘게 항해허가를 놓고 애를 태웠던 것이다.

갈수록 추워지는 날씨 때문에 하루하루 지체될수록 탐사대는 걱정에 휩싸였다. 11월 중순들어 부동항이라는 블라디보스토크 앞바다가 일부 얼기 시작하면서 탐사대의 출항여부를 의심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장대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시간적으로 쫓긴다. 더 지체할 수 없을 정도로 추위가 밀려오고 있다. 대원들의 사기 저하가 걱정이다. 이것은 서바이벌게임과도 같다.'

그러나 우려는 이내 굳은 다짐으로 바뀌었다. 같은 날 일기 마지막 부분에는 탐사대의 이런 다짐이 나온다. '나는 오히려 어려움이 많은 것에 대한 우려보다는 이러한 날씨를 선택하게 되는 최초의 사람으로서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아무나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불굴의 투지가 읽혀지는 대목이다.

출항예정일은 11월 말에서 뒤로 밀려 12월 중순으로 정해졌다. 출항 안내장도 만들었다. 그러나 12월17일 장대장은 뗏목제작 마무리 작업을 하던 중 뜻하지 않게 왼손 세끼손가락과 넷째 손가락 뼈마디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상처가 심해 장대장은 1주일여 동안 병원에 입원해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이때문에 출항은 또다시 연기됐다.

뗏목 만들기는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12월24일 끝났다. 장대장은 또 이날 병원에서 수술 실밥을 풀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조선소 사용료를 내야만 뗏목을 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 한번 극동대학에 신세를 졌다. 보증을 서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12월30일 드디어 조선소 크레인이 발해 1300호를 들어올려 바다에 띄웠다. 1천3백년 전 발해의 숨결이 살아있는 바다에 뗏목이 뜨자 탐사대원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연해주 정부의 예인선 사용허가도 떨어졌다.

러시아로 준비차 떠날 때까지만 해도 출발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쪽으로 2백80Km 떨어진 크라스키노항에서 할 계획이었다. 크라스키노지방은 발해의 행정구역인 동경용원부에 속했으며 당시에는 '염주'로 불렸다. 청나라 때 이곳을 옌추 또는 옌춘이라고 불렀던 것은 바로 '염주'에서 연유한다. 아직도 이곳에는 발해시대 성터가 남아 있을 만큼 우리 민족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그런데 크라스키노는 북한과 러시아의 국경선인 두만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무렵 북한 경수로 공사 중단사태까지 불거져 나왔다. 남북관계의 경색은 탐사대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촉박한 일정과 예인선 사용료 부담도 문제였지만 이곳에서 출발했을 때 자칫하면 북한 영해를 침범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탐사팀은 동력이 없는 뗏목인 까닭에 추진할 때부터 이 점을 가장 경계했었다. 실제로 탐사팀이 작성한 항해도를 보면 북위 42도에 가까운 북한 영해 근처에서 한바퀴 원을 그리는 위험한 순간을 맞기도 했다.

발해인 한반도 남부와 일본 왕래 증명
그래서 출발지를 크라스키노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바꿨다. 그 이유는 장대장이 현지에서 쓴 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를 몇번 드나들면서 우리 한인들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무시와 냉대를 느꼈다'는 것이다. 그래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축제를 벌인 뒤 출발함으로써 한인들에게 민족의 웅대한 혼과 자부심을 심어 주기로 했다'는 대목도 일기에 남아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연해주의 주도로 극동에서 가장 큰 도시여서 이런 면모를 보여 주기에는 크라스키노보다 훨씬 유리했다.

실로 그들이 목숨을 걸고 발해 항로 탐사에 나선 것은 천년이 넘도록 역사속에 묻혀 잊혀가는 발해사를 우리 눈앞에 살려내 보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평소 해양주권 확보과 해양국가로의 발전을 외쳐온 탐사대로서는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를 아우르고, 동해를 통해 일본과 교역했던 뛰어난 해양국가 발해의 역사를 되살리는 일은 무엇보다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또 성공적인 항해로 발해인들이 일본을 왕래하면서 울릉도와 독도를 중간 기착지로 삼았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독도가 고대부터 우리 땅이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장대장은 현지 준비차 머물던 러시아에서 탐사를 앞둔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발해 대조영이 나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나길 바란다. 민족의 웅대한 기상이 서려 있는 1천3백년 전 뱃길을 뗏목 타고 내려오면서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치고 싶다.' 탐사대가 항해 중간에 울릉도에 들르려다 폭풍우를 만나 실패하고 해류를 따라 동쪽으로 밀려가면서 독도를 곁에 두고도 지나치는 장면은 그래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미완의 탐사는 가치가 없는 것일까. 대답은 이번 탐사의 출발지였던 러시아에서 먼저 나왔다. 2월7일 러시아 극동대는 이렇게 발표했다. “장철수 대장이 항해를 마치지는 못했지만 발해인들이 연해주에서 한반도 남부와 일본을 왕래했음을 증명해 해양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우리는 전체교수회의에서 이러한 결론을 내리고 해양학 명예박사학위 수여를 인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보상은 국민들이 이들 탐사대원들이 이루고자 했던 뜻을 높이 평가하고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한 추모비 건립 등의 사업을 시작했다는 점이다.